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야마모토 이소로쿠 (문단 편집) == 평가 == [[제2차 세계 대전]]에 종군한 [[일본군]] 장성들 중에서 나름 유능하고 선진적인 사고방식을 지녔다고 평가받는 사람이나 [[일본 해군]]의 한계는 극복하지 못했다고 보이며, 상당부분 미화가 된 부분도 존재한다.[* 이러한 점은 전근대적인 사고를 완전히 떨치지 못했던 [[이홍장]]이나 독일 내에서 자기네들의 소왕국을 건설했고 그에 따라 파벌주의적 경향을 보인 [[독일군]]의 수많은 장성들에게서도 나타나는 사항이다.] [[진주만 공습]]이 대성공하자 이때의 기동함대(3개 항공전대, 항모 6척)에서 4척은 남방 작전에 투입하고 5항공전대(항모 2척)로 동쪽의 [[미국]]을 막게 하였다. 기동함대의 전력을 분산시킨 것이다. [[일본]]은 그동안 아무도 생각 못 한 항모의 집중 운용 전술을 스스로 포기하였고, 그에 비해 미국은 일본의 전술을 보고 배워 이후 항모를 집중 운용한다.[* [[미국]]도 집중 운용에 대한 개념 자체는 있었다. 다만 이것이 현실화된 것은 미 해군의 전함이 [[진주만 공습]] 당시 주요 목표물로 격침되었거나 대파되어 운용이 불가능하게 된 이후였다. 당시 항공모함은 모두 진주만 밖에 나가있어 피해가 없었기 때문에, 반강제로 항모 중심의 기동부대로 재편성하여 운용하는, 말하자면 꿩 대신 닭이었던 셈. 그러나 이 항공모함들은 이후 미국이 태평양 전쟁에서 주도권을 잡는데에 혁혁한 공을 세웠으며, 그때까지 지원함 격에 지나지 않던 항공모함의 위상을 전략무기급으로 올려놓았다. 알고 보니 닭이 사실은 [[봉황]]이었던 것.] 미국의 사료를 보면 전쟁 초 상황이 매우 긴박함을 알 수 있는데, 실제로 야마모토 이소로쿠가 타임 리미트로 잡은 약 6개월-1년동안 태평양 방면에서 정면에서 맞대응할 정도로 운용할 만한 전력이 남아 있지 않았던 것이다. [* 미드웨이 해전 당시 산호해 해전에서 만신창이가 되어 귀환한 요크타운을, 니미츠 제독이 괜히 '''3일'''안에 땜빵 처리해서 전투에 투입하라고 지시한 게 아니었다. 실제 당시 태평양 함대가 가용 가능한 항공모함은 3척뿐이었고, 이 부대들은 태평양 함대의 전부였다. 만약 미드웨이 해전에서 진다면 태평양 함대는 새로 건조되는 함선들이 투입되는 약 1년여 가까이 진주만에 갇혀있어야 했으므로 긁어모을 수 있는 모든 전력을 다해 부딪혔다.] 그러나 일본은 더이상 공격하지 않았다. 만약 일본이 기동 함대로 동쪽을 계속 공격해서 몇 척 안 남은 태평양 함대를 전멸시키거나 최소한 고착 견제만 해도 남방은 저절로 일본의 손에 들어오는 상황이였다. 실제로 분산되어 남방 작전에 투입된 항모 4척도 상대할 적이 없었다. 미국의 전함이나 항모가 남쪽에 있던 것도 아니었으니, 지상 폭격에 동원되는 것이 고작이였다. 이러한 점 때문에 [[진주만 공습]]의 비행 총대장 후치다 미쓰오는 그외 회고록에 "(적이 없어서) 폭탄을 떨어트릴 목표를 찾으려고 고생하는 작전에서, [[일본 해군]] 함대 결전의 주력인 항공모함 여러 척을 투입해도 괜찮은지 연합함대 사령부의 의도를 알 수 없었다. 내가 존경하는 야마모토 대장이긴 하나 야마모토 이소로쿠도 평범한 제독이라는 생각이 내 가슴에 싹트기 시작했다"라며 비판 하였다. [[미드웨이 해전]]에서 [[나구모 주이치|나구모]]가 아닌 그가 작전 지휘를 맡았다면 전투에서는 이겼을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미드웨이 당시 야마모토가 이끄는 본대는 미드웨이로부터 400여 km나 떨어져 있었고, 다른 함대도 상황은 마찬가지여서 지원이 여의치 않은 상황임을 보면, [[일본]] 측의 무의미한 아쉬움일 뿐이다.[* 실제로 나구모와 야마모토는 야간을 틈타 미 함대에게 돌격하여 포격, 수뢰전을 펼치는 것을 고려했으나 그것이 거리상 현실적으로 불가능한데다 아침이 오면 항공 전력이 박살난 일본군이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을 수 밖에 없어 포기하고 후퇴했다.] 게다가 작전 전반에 걸쳐 야마모토 자신이 작전의 제1목표를 미 함대 격멸인지, 미드웨이 섬 점령인지 애매모호하게 지시를 내림으로서 나구모의 실책을 유도하는 데 일조했음을 부정할 수 없다. 더구나 [[미드웨이 해전]]을 벌일 당시의 상황을 좀 더 살펴보면 지휘체계가 일원화되지 못한 당시 [[일본군]] 군령 체계에 문제가 많았으며, 야마모토는 이 점을 해결하기는 커녕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상층부의 전략을 무시하고 자신의 생각을 밀어붙였다는 게 드러난다. 즉, 나구모가 지휘했든 야마모토가 지휘했든 결과는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자세한 사항은 [[미드웨이 해전]] 항목을 참조. 실전부대의 톱으로서 도고 헤이하치로 이래 최전선에서 직접 지휘를 맡는 연합함대 사령장관이라는 직책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중요한 싸움에서는 항상 안전한 전함에 타 후방으로 빠져 있었고, 이것은 연합함대가 자랑스럽게 내세우던 '''지휘관 선두'''라는 전통마저 깨는 계기가 된다.[* 현대 해전에서는 통신수단의 발달이나 전방에서의 생존성 및 그에 따른 지휘계통 혼란 문제도 있어 선두 지휘는 단점이 더 큰 것으로 여겨진다. 니미츠는 이를 고려해 자기가 직접 일선 함정에서 근무하지는 않았고 오히려 후방의 사령부나 본토에서만 일했다. 그러나 이 문제는 [[일본군]]의 관료제 하에서 최고사령부의 의도가 일선 부대에 정확하게 전달되지 못하는 더 큰 문제를 만들었다. 역사와 인물 [[쇼와]] 56년 5월호 '[[태평양 전쟁]] 중 [[일본 해군]] 지휘관을 평가한다' [[http://www.geocities.co.jp/WallStreet/2687/jinjiotu/jinji11.html|#]] [[http://wgforum.kr/kancolle_war_museum/7453343|#번역]] 그리고 연합함대 사령장관은 니미츠처럼 후방 관리 행정 업무만 처리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 분명히 실전부대를 직접 지휘해야 하는 직책이다. 야마모토에게 니미츠처럼 아예 선진적인 업무 분담 시스템을 구축한 공이 있는 것도 아니고, 정말로 그런 생각이었다면 결전을 대비한 주력 함대로서 전방 정박지에 진출한 전함에 좌승해 있어야만 하는 이유도 설명될 수 없다.] 아예 [[레이테 만 해전]] 당시 후임 연합함대 사령장관이었던 도요다 소에무는 연합함대에 사실상 [[옥쇄]]하라는 명령을 내려놓고 후방에 빠져있었고, 이것은 미 육군 수송선단 격파라는 목적 달성에 실패하는 큰 원인이 된다. 사령장관직을 걸고 벌인 진주만 공습에서도 그가 그다지 신뢰하지 못하는 나구모를 보내고 자신은 본토의 기함 나가토에 머물러 있었고 [[미드웨이 해전]]에서 역시 전함 [[야마토]]를 기함으로 하여 먼 후방에 있었다. 정작 미드웨이의 대패 이후로는 별로 도움도 되지 않을[* [[오자와 지사부로]]는 연합함대 사령장관이 되었을 때 이미 지휘할 함대가 없었지만, 1기동함대 사령장관 때는 최신예 항모 다이호를 기함으로 세워 직접 지휘를 맡고 야마토, 무사시, 나가토와 같은 전함들은 전방에 세운 것과 비교된다.] 전함을 트럭 정박지로 끌고 오면서 피 같은 [[석유]]와 물자를 낭비한다. 반면에 태평양 섬 전투에는 신경을 써서 지상부대를 격려하기 위해 자주 시찰을 다녔다. 그의 사망 역시 부건빌 전선에서 육군 부대를 격려하기 위해 날아가다 죽은 것으로 상당히 대조적인 모습을 보였다. 싸움을 피했다는 것과는 별도로 전선을 시찰했다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니지만 연합함대 사령관의 전선 시찰 계획, 즉 특급 군사 기밀이 고스란히 적국에게 실시간으로 털리고 있다는 상황 자체가 문제였다. 도고 헤이하치로 곁에 묻혔을 정도로 일본에서는 나름 추앙받는 인물이기는 하다. 물론 그 평가에 거품이 낀 것은 부인할 수는 없다. 니미츠가 야마모토를 경시했다는 이야기가 국내에서 유명한데, 야마모토를 제거하려는 계획을 보고받은 니미츠 제독이 '''"더 유능한 놈이 대신하면 어떻게 하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당시 계획을 입안한 정보장교 레이튼 중령은 '[[일본군]]의 정신적 충격이 매우 클 것이다' + '그의 후임이 될 사람 중에서 '''"그보다 똑똑한 사람은 없다"'''라고 설득했다고 하고[* 혹은 "그는 제독님(니미츠)과 같은 존재라 다른 누구로 대체할 수 없다"라고 했다고도 한다.]), 니미츠는 마지못해 승락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저 표현만으로 니미츠가 야마모토를 경시했다고 보는 건 비약이다.[* 태평양 전쟁사에 대해 더욱 활발히 이야기되는 영미권 커뮤니티에서는 이런 논란이 없다. 사실 야마모토는 미국에서는 자주 니미츠와 비교되며, 위 일화도 니미츠와의 라이벌 구도로 보기도 한다. 단순히 번역의 뉘앙스 차이로 일어나는 오류로 보인다.] (다른 구체적인 발언이 있다면 추가 요망) 당연히 [[미국]] 입장에서는 암호 해독이라는 엄청난 이점을 걸고 야마모토를 제거하려는 도박을 하고 있는 건데, 암호 해독이 간파당하고 야마모토 후임으로 더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와 버리면 삽질한 건 거꾸로 미국이 된다. 그런 리스크에 대해서 확인을 하는 것은 상관의 당연한 역할이지, [[임팔 작전]]처럼 보급 문제가 답 없는게 뻔히 보이는데 모르는 척 그냥 승인해주는 게 당연한 게 아니다. 정말 니미츠가 그렇게 믿었다면 애초에 작전을 강하게 반대했어야 맞고, 니미츠가 반대하면 누가 작전을 추진할 수 있단 말인가? 또한 그 역시 상술한 대로 [[일본군]]의 전형적인 병폐였던 연공서열과 구시대적 함대결전 사상에 찌든 면모가 속속 드러나고,[* [[사카이 사부로]]가 여러 서적에서 그를 제대로 비판한다. 비행총대장 후치다 미쓰오는 그의 책에서 야마모토를 그저 그런 범장이라고 까고 있다.] 그 자신이 조약파이면서도 조약파와 함대파간에 논쟁이 벌어졌을 때는 군령부총장 후시미노미야 히로야스 왕이 이끄는 함대파에 영합하는 발언을 하여 조약파가 대량 숙청당했을 때 무사히 빠져 나갔으며, 전쟁을 막고 싶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은 채 떠벌이기만 하고 다녔다는 비판이 나오는 등 '''사실은 평판에 거품이 대단히 많이 낀 인물'''임이 드러났다. 특히 [[일본]]에서는 [[해군선옥론]]이라는 이름으로 일반적으로 [[일본 육군]]에 책임을 물으면서 [[일본 해군]]에는 관대한 부분이 있는데, 이런 분위기에서 야마모토의 주도로 인한 실책조차 육군 측에 떠넘겨지는 식으로 미화된 사례도 존재한다. 야마모토의 잘 알려지지 않은 실체에 대한 참조글.[[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qgH7&articleno=419&categoryId=5®dt=20151012171244|#1]], [[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qgH7&articleno=420&categoryId=5®dt=20151013164647|#2]], [[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qgH7&articleno=421&categoryId=5®dt=20151014172734|#3]], [[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qgH7&articleno=422&categoryId=5®dt=20151015171715|#4]], [[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qgH7&articleno=423&categoryId=5®dt=20151017131203|#5]], [[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qgH7&articleno=424&categoryId=5®dt=20151018160231|#6]], [[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qgH7&articleno=424&categoryId=5®dt=20151018160231|#7]], [[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qgH7&articleno=426&categoryId=5®dt=20151020180124|#8]], [[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qgH7&articleno=427&categoryId=5®dt=20151021172901|#9]], [[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qgH7&articleno=428&categoryId=5®dt=20151022172646|#10]], [[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qgH7&articleno=429&categoryId=5®dt=20151024142915|#11]], [[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qgH7&articleno=430&categoryId=5®dt=20151025162303|#12]], [[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qgH7&articleno=433&categoryId=5®dt=20151029205312|#13]], [[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qgH7&articleno=434&categoryId=5®dt=20151030175253|#14]], [[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qgH7&articleno=435&categoryId=5®dt=20151101155302|#15]], [[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qgH7&articleno=438&categoryId=5®dt=20151110171615|#16]] 해당 링크들은 전반적으로 야마모토의 실책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지만 몇몇 부분에서 야마모토 개인의 잘못이 아닌 부분을 야마모토의 잘못으로 지목하는 경우가 있다. 1. 폭격기 만능주의는 야마모토가 만든 개념이 아니다. 야마모토도 당시 강대국들 사이에 널리 받아들여졌던 폭격기 만능주의를 수용한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당시(1936년)에 폭격기 만능주의를 수용한 것은 시대적 한계라고 봐야지 야마모토 개인의 문제라고 보기 어렵다. 미 육군 항공대도 폭격기 만능주의의 영향으로[* 미군의 당시 이 분야 대표 주자가 석기시대 마니아인 [[커티스 르메이]]였다.] B-17이 호위기도 없이 무리한 주간 폭격을 했다가 수많은 승무원들이 전사한 전적이 있다. 오히려 1936년의 시점에서 폭격기 만능주의를 비판하고 호위 전투기의 필요성을 적극적으로 주장했다면 두헤의 사상을 박살낸 항공전 사상가로 이름을 알렸을 것이다. 물론 이후 이 문제점을 적극적으로 고치지 않은 부분은 까일 거리가 맞다. 2. [[진주만 공습]]에서 타란토 공습도 제대로 못 베껴서 주간으로 했다는 것은 다소 미묘. 야마모토는 타란토 공습을 참고해서 야간에 뇌격으로 승부를 걸자는 입장이었으나 겐다 미노루 중좌가 정확한 공격을 위해서는 주간에 공격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 후 2차대전의 해전을 들여다봐도, 야간에 육군 폭격기들이 활동하는 경우는 있었어도 해군의 전투기와 급폭기, 뇌격기가 활동하는 경우는 거의 없을 정도로 당시 야간기습은 기술적으로 비현실적에 가까웠다. 실제로 진주만 기습 당시 3차 공습을 단념한 이유 중의 하나로 야간 착함이 불가능하다는 이유도 있었다. 3. 진주만 공습은 단지 소거법의 결과일 뿐이다라는 것도 다소 미묘. 일단 불가능한 방법들을 골라내는 것도 능력은 능력이고 그렇게 골라내서 그래도 쓸만한 방법을 찾아낸 것은 인정할만한 부분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보여운 온갖 어거지와 똥꼬집은 빼도박도 못할 까일거리이다. 그리고 항공모함을 주 목표로 지정한 것은 야마모토가 아닌 것도 사실. 항공모함을 주 목표로 지목한 것은 겐다 미노루와 오니시 중장이었다. 4. 진주만 공습의 효과에 대해서도 초반에 다수의 전함들이 전열에서 이탈하면서 한동안 [[미 해군]]의 작전에 제약을 가했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 [[미드웨이 해전]]에서 [[레이먼드 스프루언스]] 제독이 [[일본 해군]]을 탈탈 털어먹고도 야간에 후퇴해야 했던 이유가, 당시 일본 해군의 전함에 맞설 전력이 없었다는 것을 감안한 결과이다.[* 실제로 나구모와 야마모토는 야간에 미 함대에게 돌입하여 함대결전을 펼치려 했으나, 당시 야마모토 함대는 수백km 밖에 있었던 지라 당시 함대가 낼 수 없던 30노트(약 55km/h)의 속도로 달려와도 7~8시간이 걸렸으며, 미해군이 제자리에 가만히 떠있을 리도 없으므로 현실적으로 함대결전은 불가능했다. 애초에 함대결전사상 자체가 일본 해군의 환상과도 같은 교리였다.] 미군의 기본 전술방향마저 바꿔놓은 진주만 공습이 보잘것 없는 전과라고 하기는 어렵다. 5. 해군 제독인 야마모토가 육군이 주둔한 과달카날을 시찰하지 않았다고 까는 것도 미묘. 아무리 과달카날의 문제가 해군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지만[* 당시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와 미군간 연락을 차단하고 추가로 진출하기 위한 교두보로써 해군이 비행장을 만든 게 문제의 시작이었다. 그걸 막고자 미 해병대가 상륙했고, 그에 대응하여 일본군 육군이 축차투입하다가 판이 커져버린 것. 당시 일본 육군은 중국 전선과 동남아 전선이 메인 무대였고 태평양쪽은 거의 신경도 쓰지 않았다.], 과달카날에 주둔한 [[일본군]]은 육군인데 해군 제독인 야마모토가 시찰할 이유가 없다. 미국의 사례를 드는 것도 다소 부적절한 것이, 과달카날에는 [[미 육군]]만 있는 것이 아니고 [[미 해병대]] 또한 주둔하고 있었고 니미츠의 경우 태평양 해역의 해군, 해병대, 육군을 전부 지휘하는 입장이었기에 상황이 다르다. 게다가 고질적인 [[일본군의 육해군 대립]]을 생각하면, 이건 야마모토 개인의 문제라고 보기는 어렵다. 1933년 '''해군 항공본부 기술부장''' 시절, '적 공격기의 선회기총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보다 사정거리가 긴 무기를 개발/훈련해야 한다'라는 시바타 타케오[* 야마모토의 파벌이던 [[겐다 미노루]]와 동기로, 항공전에 대한 의견 차이로 대립 관계였다.]의 진언을 '''"제국해군의 오늘이 있기까지 육박필중의 전통 정신이 있었다. 향후 1미터라도 사정거리를 늘리려는 것은 절대 용납할 수 없다"''' 는 말로 [[똥별|일축한 일]]까지 있다. 군사적인 부분과는 별도의 단점으로는 카와이 치요코(河合千代子)라는 [[첩]]과의 관계가 있다. [[진주만 공습]] 이틀 전에도 연애편지를 쓰는 것은 애교였고, 심지어 군사 기밀에 해당하는 작전 기간에 대한 정보까지 전달했었다. 이런 치요코의 존재가 드러날 경우 야마모토의 평판에 금이 갈 것은 분명했기에 야마모토 사후 몇몇 장교들이 자살을 권유할 정도였다. 치요코는 자살 대신 대부분의 편지를 군부에 넘겼으나 몇 장은 숨기고 있었으며, 그 남은 일부의 편지가 그 모양이었다. 또한 심각한 '''[[도박 중독]]자'''였다. 일단 자리에 한번 앉으면 10시간이고 20시간이고 일어나지 않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런 모습을 11년작 영화에서는 틈만 나면 [[쇼기]]를 두는 것으로 묘사했다.] 물론 이런 기질이 작전 지휘에서 드러난 경우는 비교적 드문 편이다. 문제는 그런 기질이 나와서 제대로 말아먹은 전투가 있으니, 그게 바로 [[미드웨이 해전]]. 이 전투에서 입은 타격으로 이후 [[일본군]]이 제대로 공세로 나서기가 어려워졌다는 것을 감안하면 심각한 실책이 아닐 수 없다. 야마모토의 도박 중독자로서의 면모는 전투지휘 자체보다는 그 이외에서 드러나는데 [[말레이 해전]]에서 일본 항공기의 출격 이후 그 결과를 두고 내기를 했다는 일화도 남겼고[* 미와 요시타케 대좌와 [[맥주]] 내기를 했는데 야마모토는 리나운 격침, KGV 대파에 내기를 걸었고(당시 일본은 함급까지만 파악한 상태였다) 요시타케는 2척 전부 격침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결과는 요시타케의 승리. 야마모토는 기뻐하면서 원하는 만큼 맥주를 주라고 지시했다.] 해군 내에서 포커로는 야마모토를 당할 사람이 없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나 상기 링크된 지휘관 좌담의 증언을 보면 [[블러핑]]에 올인하는 스타일이라 어쩌다 이겼을 때 고수처럼 보이는 것뿐이고 실제 실력은 별로였다고 한다. 또한 [[러일전쟁]]에 초급장교로 참전했을 때 전투와는 무관한 사고로 손가락을 잃었는데 후에는 이것을 전상이라면서 자랑하고 다녔다고도 하고, 이래저래 과시욕이 좀 있는 사람인 건 사실인 듯 하다. 이런 예는 [[일본군]] 전체를 봐도 많은데 예로 황족인 [[후시미노미야 히로야스 왕]]도 [[러일전쟁]] 중 가슴에 전상을 받았다는 걸 자랑하고 다녔다는데, 실은 전상이 아니라 사고로 다친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함대파에 속하였던 후시미노미야 히로야스 왕이 군령부 총장이 되었을 때 동병상련의 정이 있어서인지 모르겠지만, 야마모토가 조약파였음에도 중책에서 내쫓지 않은 것은 그러한 일 때문에 살려준 것이다. 게다가 야마모토 자신의 정치력도 대단했고. 함대파에게 강경하게 반응해서 조약파가 쓸려나갈 때 커리어가 끝날 뻔한 이노우에 시게요시를 "강경한 남자야말로 쓸모가 있다"는 이유로, 한직이긴 하지만 연습전함 히에이의 함장으로 임명하여 해군 상층부로[* 이 시기는 큰 배의 함장, 특히 전함의 함장으로 근무하는 것이 제독으로 승진하는 정석적인 코스였다. 실제로 장관급까지 못 갔던 사람들은 아무리 잘 타도 순양함 함장이 커리어의 끝이었다. 그리고 연습전함 히에이에는 [[쇼와 덴노]]도 종종 좌승하곤 했다.] 복귀할 길을 열어놓은 것만 보아도 후시미노미야는 사람 보는 눈은 확실히 있었던 사람이다. 케케묵은 전함우위사상에 물들어서 그렇지. 단지 야마모토가 자신과 다른 라인이었을 뿐. 해군 내 항공주병파의 거두로서 그의 라인에는 오자와나 야마구치 같은 유능하다는 평가를 받는 인물도 있었다.[* 다만 연공서열을 비롯한 기기묘묘한 [[일본 해군]]의 구조 덕에 그들은 필요한 순간에 함대를 지휘할 자리에 앉지 못했다.][* 나구모는 그가 데려온 게 아니라 연공 서열로 어쩔 수 없이 앉히게 된 케이스였다.] 그러나 [[카미카제]]의 공식적 발안자인 오오니시 타키지로, 찬반양론이 갈리는 [[겐다 미노루]], 연합함대 참모로 야마모토의 실패를 함께한 쿠로시마 카메토 등 야마모토 파벌의 항공주병파라고 꼭 유능하지는 않은 게 함정. 그래도 [[일본군]]에서 미국의 힘을 가장 잘 알고 있던 인물임은 확실하다.[* 물론 야마모토만 알고 있던건 당연히 아니다. [[일본]]에도 바보 군인이나 천치 공무원만 있었던 것은 아니고 [[미국]] [[유학]] 다녀온 사람들이 많았다. 그래서 전쟁 전에 [[일본 정부]]와 군부는 미국과의 전쟁에서 승산이 있느냐를 각각 연구했는데, 그 결과는 당연히 승산 없음. 하지만 당시 일본의 군부와 군부 출신 정계의 고위직들이 그걸 싸그리 무시했고, 반발하고 비판한 자들을 징병해 내보내거나 입을 틀어막았다. 물론 그와 별개로 [[미국]]이 그 정도로 강력한 나라라고 생각한(일본이 이길 수 없다 정도가 아니라 최강급 초강대국이라는 사실)을 간파한 사람은 추축국 전체를 뒤져도 없다시피 하니 패스.]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 당시 불만을 품은 강경파들을 상대로 '''이 조약의 의미는 [[일본 해군]]이 3으로 묶인 게 아니라 [[미국]]과 [[영국]]을 5로 묶은 데 있다. 무제한의 건함 경쟁이 일어나면 3대 해군국간의 전력비는 5대 3은 커녕 10대 1로 벌어질 것이다'''라면서 설득한 적이 있다. 그리고 태평양 전쟁에서 그 말은 현실이 된다.[* 정확히는 [[미국]] 한정. 하지만 미국은 혼자서 1대 10이 아니라 그 이상으로 벌려버렸다. 미군과 일본군 간 해군 격차가 가장 거대했던 시점(1945년 7월경)의 비율은 '''1대 40에 가까웠다(!)'''.] 3국동맹에도 불만을 가졌고 [[진주만 공습]] 때도 대미교섭이 타결되면 어떤 시점이든 간에 즉시 귀환해야 한다는 명령을 내렸다. 일선 사령관들이 불만을 품자 '''"불만이 있는 자는 당장 이 자리에서 사표를 제출하라"'''는 식으로 강하게 밀어붙였다. 구두쇠 기질이 있어서, 집에만 오면 옷 닳는다며 [[훈도시]]만 입고 지냈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